신리성지의 역사

천주교 대전교구 신리성지

내포지역의 유래

내포는 신리성지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평야지대를 일컫습니다. 원래 내포(內浦)라는 지명은 ‘안쪽에 자리 잡은 갯가’ 를 뜻하는 우리말 ‘안 개’를 한자식으로 표현한데서 유래했습니다. 바다가 육지 안으로 깊숙이 휘어 들어간 지역을 뜻하는 말로 처음에는 바닷물이 수로를 타고 내륙으로 들어와 육지와 만나는 지역을 가리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이 일대는 서해 바닷물이 들어오는 하천과 주변의 습지, 그리고 논으로 이루어진 곳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서북쪽 일대지역을 부르는 지명으로 이는 오늘날의 당진, 서산, 아산, 홍성, 청양지역에 해당하며 넓게는 보령지역도 아우르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천주교 역사 속에서 ‘내포’는 보다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초창기 프랑스 선교사들은 삽교천과 무한천에 접한 평야지역을 ‘내포 평야’라고 불렀습니다. 충남 당진시의 신평면, 우강면, 합덕읍, 예산군의 고덕면, 신암면, 예산읍 일대가 여기에 속합니다. 후기로 가면서 충청도 서부 전체를 포괄하는 상부내포와 하부내포로 지역이 확대되었지만 중심은 내포평야 일대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천주교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내포지역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첫째, 이곳은 서해 바다와 연결되는 평평한 습지로 구성되어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내포지방은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땅이 개간된 지역이었습니다. 둘째, 수로와 바닷길, 그리고 육로가 발달되어 있어 외부와 교류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췄습니다. 이 길을 통해 외부의 새로운 물품은 물론 사상과 종교가 쉽게 유입될 수 있었습니다. 셋째, 행정적으로는 월경지(越境地)라는 특수한 체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월경지’는 중심 도시와 지리적으로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특수한 지역을 말하는데 오늘날에는 사라진 행정체계입니다. 예를 들어 신리는 조선시대에 ‘홍주 신리’에 속해 있었습니다. 당진시와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멀리 떨어진 홍주(홍성)에서 관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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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 천주교

내포지방은 지도를 놓고 보면 삽교천과 무한천 두 물줄기가 평야와 어우러져 자궁(子宮)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양 그대로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수용된 천주교 신앙의 모태로서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내포 천주교회의 역사는 1784년 여사울(예산군 신암면) 출신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포 주민들은 기꺼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 믿음을 실천했습니다. 내포지역의 천주교는 어느 곳보다 빠르고 넓게 퍼져나갔으며 깊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내포지역은 조선시대 내내 확고한 신앙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내포지역에 천주교가 왕성하게 전파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개방된 종교적 심성을 들 수 있습니다. 유학을 기반으로 나라를 성립한 조선은 기존에 백성들의 정신을 지배하던 불교를 억압했고,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주류를 이루는 종교가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민중들의 종교적 심성은 없어지지 않았고 이 시기에 뚜렷한 신앙 체계를 가진 천주교가 소개되면서 종교적 심성이 승화하여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둘째, 내포 주민들의 동질성이 천주교 수용과 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포구와 간척지대, 월경지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 살아온 내포 사람들은 신분적·제도적으로 여러 가지 차별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천주교 가르침 안에 포함된 ‘평등과 나눔’의 정신에 매료되었고, 종교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셋째, 내포지역 인근에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를 전하고 해석해 줄 실학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천주교는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을 따르는 성호학파 사람들에 의해 먼저 수용되었습니다. 성호의 학풍을 따르는 학자들이 내포의 중심인 고덕(예산군 고덕면)에 포진하고 있었는데, 이들에 의해 새로운 가르침인 천주교가 일찍부터 내포에 소개되었습니다. 1784년 이존창이 세례를 받기 전부터 이미 천주교는 내포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이존창의 세례와 복음선포를 계기로 불꽃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신리성지

지리적 위치

충남 당진시 합덕읍에 속한 신리는 삽교천 상류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지금은 평야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밀물 때 배가 드나들었던 곳입니다. 신리의 인접마을인 거더리에는 나루가 있어 배로 외부와 왕래하기가 수월했습니다. 신리와 거더리는 합쳐서 신리로 불렸습니다. 1860년대의 기록에 의하면 신리 일대는 온통 습지였으며, 우물이 없어 주변에 흐르는 소금기 섞인 물을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고덕지역은 신리 앞을 지나는 삽교천의 상류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인데 별암, 높은뫼, 한내 등 초기 교회 신자들이 거주하던 마을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더 상류로 올라가면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가 있는 덕산이 있습니다.

신앙의 역사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세례를 받은 1784년 이후 신리에 천주교가 전해지게 됩니다. 이 시기 신리에 정착해 살고 있던 밀양 손씨 집안을 중심으로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66년 무렵에는 마을 사람 400여 명 전체가 신자로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성장합니다. 신리는 바닷길을 통해 외부와 접촉하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내포의 교우촌들과 쉽게 연결된다는 이점이 있었기에 조선 천주교회의 중요한 거점 지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865년부터 신리에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거주했으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입국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신리의 첫 순교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안드레아)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자선(토마스) 성인이 공주에서 순교한 이후 서울, 수원, 홍주, 해미, 보령 갈매못 등에서 40명이 순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는 이름이 밝혀진 내포지역 순교자들 중 10%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신리의 신자 가운데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무명 순교자들’도 많았는데, 인근 대전리 공동묘지에 위치한
46기의 무명 순교자 묘지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무명 순교자의 묘

무명 순교자의 묘

병인박해와 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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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으로 떠나는 선교사들

파리 외방선교회 사제들의 파견식

당시, 박해나 음식, 풍토병 등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상황에 따라 이 지역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의 평균 활동 기간은 3년이었다. 선교지로 떠나는 신부님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몇 년 안에 확실히 목숨을 잃게 될 것을 내다 보며, 순교자 유해에 하듯이 그분들의 발에 친구하고 있는 교우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파리 외방선교회 본부 현관에 걸린 이 그림에 나타나는 신부님들은모두 조선에서 병인박해(1866) 때 순교하신 분들이다. 그리고 그 성당의 성가대 지휘자였던 구노는 학생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이자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졌던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서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져 유명한 ‘아베마리아’를작곡했다고 한다.

병인박해는 흥선 대원군의 명령으로 1866년 시작되어, 그가 실각하는 1873년까지 계속된 박해를 일컫습니다. 대원군은 서양 세력이 확장해오자 위기의식을 느꼈고,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하게 됩니다. 비록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신자들은 신앙 안에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합니다.

신리에는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고 있었기에 관련 인물들이 먼저 체포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이웃 교우촌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가 자수하면서 다블뤼 주교와 함께 순교의 길을 떠납니다. 이 때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집 주인 손자선(토마스)과 사목활동을 돕던 황석두(루카)도 체포됩니다. 이들 중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복사는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다음 날 손자선 회장은 공주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같은 해 4명의 신자가, 이듬해 6명이 순교록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1868년 더 큰 박해가 일어나면서 신리의 신자 19명이 순교하게 됩니다. 이 해 4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하기 위해 덕산에 침입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오페르트 일행은 몇몇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신리 앞을 흐르는 삽교천을 이용해 남연군 묘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도굴 작업은 미수로 그치고 오페르트가 도망하면서 신리를 포함한 내포지역 교우촌 전체가 붕괴될 만큼 엄청난 박해가 일어납니다.

정치적 상황이나 특정한 사건에 연루되어 천주교인을 핍박하는 박해가 일어났지만 신리의 신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앙에 따라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신리의 무명 순교자들 대부분은 오페르트 사건 이후 생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869년에 3명, 1870년에 1명, 연도 미상 1명이 추가로 순교록에 기록
되었지만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신리를 떠나 뿔뿔이 흩어진 신자들은 순교자들에 관해 증언할 형편이 못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박해로 신리 교우촌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단 한 명의 신자도 살지 않는 비신자 마을로 변하게 됩니다.

공소로 재탄생한 신리

공소 복사본

양촌 공소

병인박해 이후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신리에는 오랫동안 신자들이 터를 잡지 못했습니다. 오랜 박해를 기억하는 주민들이 천주교 신자들의 유입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내포 교회의 중심이었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땅인 신리는 신자들 사이에서 신앙을 회복해야만 하는 소중한 장소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1890년대 들어 내포지역에 성당을 설립할 여건이 갖추어지자 신리의 교회사적 역할이 부각되었습니다. 1892년 프랑스 선교사 퀴를리에 신부는 신리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양촌(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성당을 세웠습니다. 신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마을에서 퀴를리에 신부는 주민들이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회복하게 되기를 염원했습니다.

“저는 양촌에 정착하면서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가 살았으며 많은 순교자들의 땅인 이곳 내포에 매일 미사 때마다 구세주께서 내려오시리라 믿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변의 주민들이 그들이 믿음을 회복하는데 가장큰 장애물인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를 바랍니다.”(1892년 5월 12일 퀴를리에 신부 편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신리 주민들이 믿음을 회복하면서 1923년 거더리(신리 포함)에 공소가 설립되었습니다. 1927년 신리의 신자들은 다블뤼 주교가 지냈던 손자선 성인의 집을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하게 됩니다. 복원된 생가(주교관)의 기둥과 뼈대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문지방 디딤돌, 집 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 등 대부분이 그대로 보존되어 성인들의 손길과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1968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이 시복되자 신리에는 순교복자기념비가 건립되었습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설립 200주년을 맞으면서 천주교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신리의 중요성도 점차 부각되었습니다. 이곳은 2008년에 전대사 지정성지로 지정되어 곳곳에서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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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복자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