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는 흥선 대원군의 명령으로 1866년 시작되어, 그가 실각하는 1873년까지 계속된 박해를 일컫습니다. 대원군은 서양세력이 확장해 오자 위기의식을 느꼈고,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하게 됩니다. 비록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신자들은 신앙안에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 합니다.
신리에는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고 있었기에 관련 인물들이 먼저 체포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이웃교우촌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오메트르신부와 위앵신부가 자수하면서 다블뤼주교와 함께 순교의 길을 떠납니다. 이 때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집주인 손자선(토마스)과 사목활동을 돕던 황석두(루카)도 체포됩니다. 이들중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복사는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다음날 손자선 회장은 공주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같은 해 4명의 신자가, 이듬해 6명이 순교록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1868년 더 큰 박해가 일어나면서 신리의 신자 19명이 순교하게 됩니다. 이해 4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하기 위해 덕산에 침입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오페르트 일행은 몇몇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신리 앞을 흐르는 삽교천을 이용해 남연군 묘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도굴작업은 미수로 그치고 오페르트가 도망하면서 신리를 포함한 내포 지역 교우촌 전체가 붕괴될 만큼 엄청난 박해가 일어납니다.
정치적 상황이나 특정한 사건에 연루되어 천주교인을핍박하는 박해가 일어났지만 신리의 신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앙에 따라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신리의 무명 순교자들 대부분은 오페르트 사건이후 생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869년에 3명, 1870년에 1명, 연도 미상 1명이 추가로 순교록에 기록되었지만 더 이상자세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신리를 떠나 뿔뿔이 흩어진 신자들은 순교자들에 관해 증언할 형편이 못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박해로 신리 교우촌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단 한 명의 신자도 살지 않는 비신자 마을로 변하게 됩니다.